11.10.2017

프랑스 북쪽 시골 에서 살아본 이야기.




올해 8월 내 컴퓨터가 죽어버리면서 잃어버린 사진들을 오늘 운좋게 몇개찾아왔다. 내가 수도승처럼 빵집하나없는 놀망디시골 에 살았을때 찍은 사진들중 몇개를 이곳에 실어보자한다. 내가 살았던곳은 표지판도 없어서 우체부들이 잘 찾지도못하는곳이였다. 처음 파리에 와서살때 레스토랑에서 3개월 일한적이 있는데 그때만난 친구 '쟌'이 자기남자친구와 허물어져가는집을 한채 사서 보수공사를 해서 1층을 세주었는데 마치 각본에 짜여진것처럼 첫번째 타자로 내가 이곳으로 오게된것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오른쪽 큰문 과 그옆 작은 창문이 내집이였고 나머지는 전부 친구부부들것이다. 내가 살던곳은 원래 동물들을 가두어두는 외양간이였지만 그럴듯하게 공사를해서 나같이 멍청한 예술가가 살기엔 괜챦은곳이였다.  다만 그곳이 북쪽으로 놓여져있고 천장이 높아 나는 그곳에서 늘 추위에 떨어야했다. 10개월 춥고 2 개월 따뜻.

이곳은 Bissieres '비시에' 라고 불리는 작은마을로 200명도 안되는 사람들이 살고 또 상업적인것은 담배가게 하나없는... 소들과 말들이 살고있는 말 그대로 시골촌 이였다. 나는 그곳에서 내나이 46세 부터 정확하게 4년반을 살다가 나왔다. 만약누군가 내게 거기서 뭐했냐고 묻는다면 도를 닦았다고 말하고싶다. 왜 프랑스에서 이런 시골에 가서 살았냐고 묻는다면 난 이것이 내 선택이면서 운명이였다고 밖에는 표현하기힘들다. 내삶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기간이 정말 필요했다. 내가 진정 원하는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늘상 산책하던, 집을 나오면 걷게되는 길에는 큰나무가 두개 있었고, 길이름은 rue lion d'or  '황금의 사자' 였다. 나는 여름내내 이곳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탔다. 주변의 벼들이 가을쯤 황금색으로 물들면 바람과 함께 출렁되던그곳은 내게 바다였다. 근데 어느날 나무 하나가 사라졌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다보니 내가 알고지내던 나무들이 그렇게 싹둑 짤려나가 사라지는일들이 종종있었다. 나는 나무들과 친밀했기때문에 그들이 사라지면, 사람이 죽은것처럼 많이 슬프고 허전해서 그길걷는것을 힘들어했다.


친구들의 친구들이 여름에 가끔 찾아오면 정원에서 피크닉을 했다. 친구남자가 현대무용을 하기때문에 모임은 자주 무용하는 '칸' Caen (30분 거리) 에 사는사람들이였다. 이곳에서 나는 나이가 어느정도 든 사람들은 모두 그룹으로 모여 함께있으면 화기애애 해보이지만 속에는 늘 많은 문제들이 둥둥 떠다닌다는것도 알게되었다. 인간들사는곳은 어디든 마찬가지인게 맞다. 국적이나 문화를 떠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복잡한데가 있다. 나는 사람들 만나는것을 정말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놀망디 정신세계와 잘 맞지못한것같다. 아마 이곳이 북쪽이고 독일과 가까와지는탓인지 보수적이고 마음이 닫혀있는사람들이 많았다고 기억된다. 또 지독한 인종차별주의들도 만나 정말 힘든 곤욕을 치르기도했다. 내게 칸은 안좋은 이미지로 남은것같다. 차갑고 추었던 느낌이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그래도 내친구 쟌이 있었다. 내 편이 되어주고 내가 필요할때 진정한 친구로 있어주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곳에서 살지도 않았겠지만 그녀는 내게 소중한 한사람의 친구로 남아주었다. 사진에서 와인병을 머리에 든여자가 쟌이다.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고양이는 내 친구부부들이 키웠는데 집고양이 이면서 야생고양이다. 이사한 첫날부터 당당하게 방문해 코를골고 사지를 벌렁 뒤집어 잠자고 (처음봤다) 새벽엔 저렇게 아침이슬 맞으며 내 집앞에 찾아와 명상을 즐기고 밤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가 토끼나 어린새를 잡아먹고 누군가와 격렬한 격투를 해 피를 흘리며 돌아오는날이 자주있었던 이고양이는 아틸라 라고 부른다. 나는 정말 고양이에대한 의견이 없다. 어떨땐 좋고 어떨땐 싫다. 하지만 요물이란말이 왜 나왔는지는 이해가 간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얄밉다가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신기한 동물이 내겐 바로 고양이 다. 토끼들이 내집앞에 은신처를 마련했을때 아틸라가 몇번을 물어죽여 나는 아틸라와 전쟁을 했었다. 토끼를 살리기위해 나는 아틸라를 위협했고 그래서 우리사인 조금 멀어졌다. 그래도 배가 고프면 늘 나를 찾았다. 거의 나만 있었기때문에.



사진들을 보면서 아, 이시간들이 모두 끝나주어서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못나오고 그냥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집을 나오려는데 정말 막막했었다. 그동안 공짜로 주어졌던 모든 보호막들이 내게서 하나씩 사라졌다. 잘난척 아는척 떠들고 믿었던 신념도 에고도 나를 벗기고 또 벗겼다. 나는 두눈을 똑바로 뜨고 받아들였다. 남겨진 잔여물이 지금도 내 발목을 잡고있기도하지만 나는 지금 그렇게 힘겹게 새로운 걸음걸이를 다시한번 하고있다. 이제 블로그로 남겼으니 사진들을 잃어도 이곳에서 다시볼수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쌓여 있어 그냥 근래 과거만 단순하게 들여다보는게 더 좋은것같다.

Adding (내가 떠나오고 6개월후 아틸라가 길에서 객사했다고한다. 그의 영혼에 평화를 빈다. 작은 인연 더 잘해주지못해 미안해...)









11.05.2017

깊어가는 가을 그리고 고래꿈

일요일 이른저녁 산책을 나가려했더니 느닷없이 비와 함께 우박이 쏟아진다.  할수없이 목도리를 풀르고 책상앞에 앉아 이글을 쓴다.  얼마전 북한 영상을 미국사람이 찍은것을 보면서 사람이 태어나 진실을 알지못하고 산다는것은 그렇게 괴로운일은 아닌것같다 싶었다. 그들의 순박한 얼굴은 이세상 어디를 가도 볼수있는 그런 얼굴이였다. 다만 우리모두가 아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산다는것뿐이다. 자신들이 가진 인권을 유린당해도 그것이 생각보다 고통스럽지않은것은 잘못된 믿음덕분이다.  잘못이 아닌데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벌을 받는게 마음은 편할지도 모른다. 사실을 알게된다면 그리고 배움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면 고통은 더 가까이 올지도 모른다.  자신의 권리는 자신이 정신차리고 찾아야한는게 서양교육이다. 나는 한국에서 자랄때 내권리를 위해 나서기보다는 상대가 알아서 내권리를 찾아주는 교육을 받은것같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교육은 한국에서도 지난 정권들의 부패로 인해 바뀌고 있는것같다. 자신의 권리를 알지못하면 누릴수가 없다. 누가 찾아주지않는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사실을 알지못하고사는삶이 영원히 계속될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세상에는 인간이 만들지않은 법칙이 존재한다.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 즉, 사실은 밝혀지게된다. 어둠은 빛을 이겨내지못한다. 빛은 반듯이 오고야만다. 그래서 보고싶지않아도 봐야만하는때가 오면 그 누구도 막을수없다. 세월호 노래처럼 진실은 거짓을 이길수없다.



지금 우리가 전세계에 대한 의식 이 인터넷을 통해 높아졌다해도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나아진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여전히 인종차별이 있고 여전히 전쟁을 하고싶어하는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사실에는 눈을감고 문화나 가족들에 의해 조종된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는 미국에 비해 전반적으로 지식적인 사람이 되는것을 추구한다는 인식을 많이 받는다. 가장 수치스러워하는것중에 하나가 '무식한사람' 소리듣는것인것 같다. 그러다보니 쓸데없이 과장된 감정표현 을 쓸데없이 두려워한다. 거기다 미국인들의 대표적인 감정표현들은 부정적이미지를 확고히 심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이 추워지는 겨울 비가 내리고 어두운날이 많은 이곳에서 가끔 그들이 무식하다고 믿는 문화가 그리울때가 많다. 생각없이 웃고 떠들고 자신을 내려놓고 즐길줄아는 문화. 물론 마음맞는 친구들과 그렇게 즐길수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마음을 갖는사람들이 드물어진다고 느낀다. 내가 프랑스에서 느끼는것은 미국에서 또는 한국에서 느끼는것과 그리 다르지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선진국이라고 해서 더 행복할수있는것은 아닌것같다. 물론 자유가 없는 북한이나 생활환경이 열악한 나라보다는 누리는것들이 많겠지만 그렇지않다면 사람이 사는곳은 거의 비슷한것같다.


꿈을 꾼다는것 그리고 환상을 갖는다는것이 꼭 나쁜것은 아니다. 나는 고래꿈을 꾼다. 깊은 바닷속 에서 태어나 이리저리 헤엄치는 거대한 고래 가 움직임을 멈추었을때 들리는 그 숨소리... 그리고 그 소리가 말로 표현할수없는 침묵의 무게로 나를 삼키는 그런꿈.

북한사람들이 자유 와 독립을 배울떄 우리 한국은 함께 커다란꿈을 꿀수있지않을까? 인간은 신이 될수없다. 신은 인간을 구원하지않는다. 인간은 자신안에서 신을 만날수있고 스스로를 구원할수있는 힘을 얻을수있다. 하지만 모든것엔 때가 있고 인간이 할수있는일은 때가 왔을때 준비가 되어있어야하는것이다. 죽기전에 아버지 고향에 가볼수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대신 그땅을 밟아보고싶다.
나는 늘 혼자 운동을 해서 사진들이 없는데 이 사진 하나가 친구 엄마를 통해서 남았다. cascais비치에서 설핑을 끝내고 나오는 사진이다.

9.26.2017

바다, 프랑스 그리고 생활

이곳은 지금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작년 여름 8월 시작된 이곳생활은 놀망디에 비하면 집에 돌아온것같이 편안함이 있다. 물론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살았든 상관없이 난 늘외국인이다. 부자들이 은퇴후에 사는동네로 알려져있는만큼 종종 인종차별도 피부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사람들이 열명중 에 세네명이라면 나는 그나머지 여섯,일곱명에게서 내삶을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나라에 살든지 마찬가지라고 본다.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그 세명은 가난한사람들 깔보는 사람들이거나, 동성연애 는 죄라고 믿는사람들이거나 아무데나 침뱉는 사람들 이겠지 생각한다. 다만 외국인으로 다른나라에서 가족없이, 시민권없이 혼자산다는것은 때때로 내힘에 부딪힐때가 있다.

바다는 에너지를 만든다. 에너지가 낮을때 바다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알수있다. 바다는 차갑지만 신선하다. 그 신선함은 말로 표현이 안된다. 그 움직임의 물결이 내 온몸 세포구서구석 을 스칠때 느껴지는 따뜻한 차가움? 나는 바다를 참 좋아하는데 요즘 문득문득 한국의 산과 강이 그리울때가 있다. 보고싶고 느끼고싶다. 내가 마지막 한국에 다녀온게 2009년 겨울이였다. 8년동안 나는 한국을 보지못했다. 정체성을 잃는다는것은 다른 정체성이 생긴다는말이 될수도 있다. 나의 자식들은 미국인이고 부모는 한국인이고 친구들은 프랑스인이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젤리같다. 이곳에 가면 이렇게되고 저곳에 가면 저렇게 되는 형태가 없는 젤리. 우리 모두 사실 다 그런건 아닐까? 나는 감수성은 원하지만 자기연민은 원하지않는다. 내가 강한사람이라는 소리를 종종듣는데 사실 나자신을 내가 볼때 나는 끝없이 연약하다고본다. 자기가 자신을 가장잘 알지않을까?

지난 낙마때 새로산 핼멧을 깨뜨리던 날부터 말타기를 중단했다. 말타기에 들어가는 돈으로 화장품들을 샀다. 갑자기 피부가 정신없이 조여와서이다. 그동안 내 피부나 몸이 다 공짜로 주어졌다면 지금부터는 아닌것같다. 물론 늙는다는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좀 예쁘게 늙고싶은건 역시 욕심일까? 생전처음 주름크림과 마스크들을 사기시작했다. 여름내내 설핑과 바다운동을 즐기던 50세가 넘은 내얼굴에 검은 버섯이 보이는것은 자연스런 현상일것이다. 그래도 그 행복의 시간들과 바꿀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5년간 놀망디생활이 나를 설핑이나 운동에서 멀어지게했기때문에 이번 여름엔 바다에서 수영하는것으로 만족했고, 이번겨울 몸에 근육을 만들어 내년여름엔 다시한번 설핑을 하고싶다는 계획이 있다. 말타기는 기본적인 돈이 들지만 설핑은 공짜다. 또 나이가 들면서 운동은 더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것도 알게되었다. 늙는다는것은 내 몸안에 많은 변화 가 이는것이고 그것들을 이해하고 맞추어가는것이 필요하다. 나는 젤리 일뿐이다. 환경과 변화에 맞추어가면 된다.

나는 작은 마을에 살고있고 주변 작은 마을 을 구경하는것도 좋아한다. 다 비숫비슷해보이지만 작은 마을엔 늘 평화로움이 내살을 만지는 그느낌이 좋다. 크고 멋진 대도시도 좋지만 자연과 가까운 작은 마을이 마음을 더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고 본다. 서울에서 태어나 늘 큰도시에서 살았었지만 4년반 놀망디 시골과 곧 8년째로 접어드는 브리타니생활, 사람들보다는 바다에 의존하는 내마음이다. 프랑스에 대한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많았고 현실에 부딪힐때마다 이곳을 떠날수있다면 좋겠다는생각을 하곤한다. 사실 이곳에 가족이 없는만큼 나는 어디든 갈수있다. 하지만 이곳 친구들과 깊어진 우정들이 있고 혼자 라는 자유가 이나라 문화 와 이어져 내게 영감을 주어왔다 .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내게는 전에 없던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내 그림 프린트 샵이 활발히 움직이게하는것이다. 어렵다. 하지만 포기 안한다.


1.12.2017

새해 새마음




낮에 내내 바람불고 비가 내리는 날이였는데 지금은 비는 멈추고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며 어두움이 짙어지고있다. 나는 결국 스마트 폰을 3일전 배송받았다. 10년만에 바꾼 내 전화기 그리고 처음 스마트폰.  모두들 엄청나게 신나할때 나는 필요없다고 거부했지만 갑자기 필요한것처럼 느껴지기시작했다. 그래서 4달 할부로 샀다.

자신을 팔아야하는 요즈음시대 나는 반은 팔고 반은 필사적으로 움켜지려는 마음을 가지고있다. 예술을 한다면서 세상에 유리한데로 끌려다닌다면 내가 원하는 그림이 나올수없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내 비지니스가 안된다면 그건 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예술과 비지니스가 함께 하지않는 원리때문이고, 하늘의 뜻이 내뜻과 다르기때문이기도 하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람... 모두 재미있는 도구들이다. 이제 내가 이 스마트폰으로 무엇을 할수있을지 두고볼일이다. 더이상 모르는곳을 차운전할때 정신없이 헤메지 않아도 된다는건 꽤기쁜일인지도 모른다.

최순실딸과 어떤 부자집 아드님께서 승마 에 먹칠을 해버렸다. 나도 승마를 2년째 아니 이제 3년으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어릴때부터 많은 아이들이 승마나 보트타는것을 배운다. 우선 나는 가죽이 아니어서 찢어지기시작한 승마부츠를 신고있으며 하루에 1시간 모든장비 (말포함)까지 16유로이다. 작년 겨울에 바지하나 샀고 이번크리스마스때 처음 헬멧을 샀으며 다른장비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말채찍을 거부한다 그래서 어떤 선생들과는 정신적으로 부딪이기도했다. 배우는 입장이지만 나에겐 나만의 철학이 있다.일주일에 한번 하지만 겨울엔 조금 들하고 여름엔 조금 더한다. 말을 타는것보다도 관계를 배운다는게 나는 참좋다. 그들을 만져주고 닦아주고 늘 사과몇개준비해서 고마운마음으로 먹여주고... 예전엔 썰핑을 좋아해서 자주 바다에 갔었는데 나이가 들고 이사를 다니다가 썰핑과는 멀어져버렸다. 썰핑도 보드하나선물받았었는데 지난 놀망디집에 두고와서 언젠가찾아올수있다면 다시시작해보고싶다. 하여간 나는 예전엔 막연하게 말을 좋아했다면 지금은 말똥냄새에 뒤섞여 정말 말을 좋아하게되었다.



나는 새해들어 아직 그림을 그리지못하고있다. 마음을 깨끗이 비워야 새로운에너지가 생겨날것이기때문에 그 비움이라는 과정에 둘러싸여있다. 한편으론 괴롭고 한편으론 너무 평온하다. 마음이란 너무도 알수없는 그리고 끝이 보이지않는 곳이다. 이번일을 계기로 한국에 평민들이 모두 행복할수있는 민주주의가 깊이 잘 자리잡게되기를 정말 바란다. 또 한해가 시작되었다. 내가 원하는것이 무엇인지 왜인지 잘이해해서 거기에 맞게 시간을 잘 써야겠다...